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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앰네스티

2011년, 50년을 맞이한 국제앰네스티의 역사


[국제앰네스티 50주년 기념일 D-50] 
1961년, 두 청년이 ‘자유를 위해 건배했다’는 이유로 수감된 것에 분노한 변호사가 전세계에 
“사면을 위한 탄원”을 호소합니다. 이것이 '국제앰네스티'의 시작이었습니다. 


[국제앰네스티 50주년 기념일 D-49] 
1962년, 앰네스티는 양심수 210명의 사례를 고발하는 첫번째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전세계 그룹회원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고, 조직으로서 '국제앰네스티'가 공식출범합니다.


[국제앰네스티 50주년 기념일 D-48] 
1963년, 우크라이나의 양심수 조지프 슬리피를 비롯한 전세계 양심수 140명이 앰네스티회원들의 
탄원편지를 받고 석방됐습니다. 출범 2년만에 탄원편지의 힘을 목도하게 됩니다 
http://bit.ly/s96r6w (I have a dream - 마틴루터킹 연설.flv) 

[국제앰네스티 50년사: 47년 전]

앰네스티는 1964년 유엔에서 ‘협의 지위’를 얻음으로써, 유엔에서 인권 분야에 대해 의견을 낼 수 있게 됐습니다. 

1964년까지 앰네스티가 사면시킨 양심수는 329명에 달합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46년 전] 
1965년: 교도소 인권에 대한 첫번째 보고서 발간
동독과 파라과이, 포르투갈, 루마니아, 남아프리카의 교도소 인권 상황에 관한 보고서를 처음으로 발간합니다. 
또한 국제앰네스티는 사형 집행을 중단하고, 궁극적으로는 폐지하자는 유엔 결의안을 지지합니다. 
양심수 사면 운동으로 시작한 앰네스티의 활동이 교도소 일반 수인의 인권과 사형제 폐지까지 확대된 것입니다.

영국에서 살인범에 대한 사형제가 최초로 폐지되었다. 한국은 이 시기 일본과 한일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는, 훗날 위안부 피해자들 및 원폭 피해자들의 보상에 관한 청구권 분쟁에 원인이 되는
'청구권 협정'이 포함되어 있다. 위안부 및 원폭 피해자들의 청구권 분쟁에 관한 긴 역사의 시작이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45년 전]
1966년 앰네스티는 미국지부를 설립하고 미국의 베트남 참전에 반대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 모두를 
양심수라 칭했습니다. 
피터 베넨슨 변호사는 국제앰네스티 상근 활동을 중단하고, 에릭 베이커(사진)를 후임으로 임명했습니다. 

앰네스티는 설립 이후 1,500명의 양심수들 사례를 다루었고 1,000명의 양심수들이 석방되었습니다. 

중국에서 마오쩌둥 지도하의 홍위병 100만 명이 천안문 광장에서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인도주의 국제법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제네바 협약’이 한국 내에서 발효되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44년 전] 
1967년 전 세계 18개국에서 총 550개 그룹이 결성되었습니다. 63개국의 약 2,000명의 양심수를 지원하고 
그 중 293명이 석방되었습니다.이처럼 앰네스티는 활발한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아랍에 승리를 거두었다.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한국에서는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한 제6대 대통령 선거로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43년 전] 
1968년 앰네스티는 정치사형수의 사형 반대 입장을 밝혔고 제1회 '양심수 주간'을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의 5월혁명에 힘입어 인권보호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42년 전] 
1969년: UNESCO의 자문지위를 부여받다
앰네스티 양심수 석방 캠페인 이후, 2,000여 명의 양심수가 석방되었습니다. 
이 해 1월, UNESCO는 앰네스티에 중대한 사건에 대한 자문지위를 부여했습니다. 
또한 앰네스티는 모든 인종차별 폐지를 위한 국제협약을 채택했습니다.

1969년 당시 카다피는 리비아의 정권을 장악했다. 김수환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한국에서는 민주공화당이 국회에서 3선 개헌을 변칙적으로 통과시켰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41년 전]
1948년부터 4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의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아랍계 수인들에게 가혹행위를 저질렀습니다. 
1970년 앰네스티는 이에 대해 폭로했고, 이는 곧 국제적논쟁으로 번졌습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40년 전] 
1971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역 그룹의 탄생
국제앰네스티 설립 10주년을 기념한 캠페인은 방송과 신문 등 많은 매체에서 주목받았습니다. 
앰네스티 10주년이 되던 해, 드디어 앰네스티 한국지부도 설립됩니다. 
한국지부와 더불어 방글라데시와 멕시코에도 지부가 생깁니다. 

구 소련의 양심수 ‘슬라바 아이도바’(Slava Aidova,사진)의 아내와 딸은 앰네스티 회원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같은 해 슬라바 아이도바는 석방됩니다. 

훗날 그의 딸은 “편지를 처음 받았을 때 누군가의 돌봄을 느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편지의 힘으로 1971년에도 양심수 700명이 석방됩니다.

1971년 세계적인 환경 단체인 ‘그린피스’가 설립됐고, 한국에서는 서울에서 강제퇴거를 당해 
경기도 광주로 옮겨간 철거민 수만 명이 하룻동안 점거 시위를 벌인 ‘광주 대단지 사건’이 발생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39년 전] 
1972년: 고문폐지캠페인을 시작하다.
1972년 국제앰네스티는 처음으로 전세계적인 고문폐지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이 캠페인에 유명한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동참해 훌륭한 이미지들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미주기구(OAS) 인권위원회는 앰네스티에 협의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사진: 1972년 고문폐지캠페인 당시 스위스 지부에서 제작한 포스터

뮌헨 올림픽에서 ‘검은 구월단’으로 불리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가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납치•살해했다. 

북아일랜드에서는 평화 시위를 계획하던 시민들을 영국군이 사살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국민투표로 유신헌법이 통과돼 본격적인 유신 체제가 시작됐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38년 전] 
1973년: 국제앰네스티 첫 번째 긴급구명활동(Urgent Action) 시작

브라질의 양심수 ‘루이즈 바실리오 로시’교수(사진)를 석방시키기 위해 국제앰네스티는 처음 

긴급구명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훗날 루이즈 교수는 “앰네스티의 긴급구명 이후로 탄압이 줄어들고 상황이 나아졌다”고 밝혔습니다. 
또 앰네스티는 고문에 관한 보고서를 내고 파리에서 고문폐지를 위한 국제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유엔은 고문에 반대하는 첫 번째 결의안을 채택합니다. 
이 결의안은 모든 정부가 앰네스티의 보고서에 담긴 고문행태를 폐지하고 국제규약을 따를 것을 촉구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서울대 최종길 교수가 간첩혐의를 받고 조사를 받던 중 사망했는데, 
고문으로 인한 죽음이라는 의혹이 일었다. 칠레에서는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키며 집권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37년 전] 
1974년: 칠레 피노체트 정권의 인권 탄압에 관한 보고서 발간
칠레에서 쿠데타로 피노체트 정권이 들어선지 1년, 앰네스티는 진상 조사를 거쳐 칠레에서 일어난 
정치 탄압과 고문, 처형 등 인권 유린에 관한 보고서를 냈습니다. 
1974년은 앰네스티와 관련 있는 개인들에게 영광스런 해였습니다. 
앰네스티 국제집행위원회 위원장인 ‘션 맥브라이드’가 인권 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며, 
터키의 ‘뭄타즈 소이살’이 양심수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국제앰네스티 집행위원으로 선출됐습니다.
*사진: 칠레 실종자의 가족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 대통령 닉슨이 사임했고, 한국에서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피격당해 사망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36년 전] 
1975년 유엔 총회는 국제앰네스티 고문폐지캠페인의 권고에 따라 ‘고문 및 그 밖의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모욕적인 처우나 형벌 피해자의 권익 보호를 위한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35년 전] 
1976년 앰네스티는 76년 한 해 동안 우루과이 군부 정권의 ‘예방적인’ 억압 정책과 
고문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전개했습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34년 전] 
1977년: 국제앰네스티 노벨 평화상 수상!
국제앰네스티는 1977년 "자유와 정의를 지키는 데 헌신하여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같은 해, 앰네스티는 스톡홀름에서 사형에 관한 국제 회의를 개최했는데, 
여기서 각국에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사형 폐지”를 촉구하는 스톡홀름 선언이 나왔습니다.

남아공의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을 주도한 인권 운동가 스티브 비코(Steve Biko)가 경찰서에서 구금 중 
사망했다. 한국에서는 미국 국회에 로비 활동을 벌인 혐의로 재미 교포 사업가 ‘박동선’이 미국 법정에 기소되는 
‘코리아 게이트’ 사건이 발생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33년 전] 
1978년: 국제앰네스티, 유엔 인권상 수상!!!
국제앰네스티는 "인권분야의 두드러진 기여"를 인정받아 유엔인권상을 수상했습니다. 
1978년은 세계인권선언 30주년(사진)이 되는 해로, 앰네스티는 칠레의 유명 예술가 30명과 함께 
칠레 '인권의 해'와 세계인권선언 30주년을 기념했습니다. 
칠레 예술가들의 실크스크린 프린트 컬렉션은 세계인권선언의 30개 조항을 각각 나타내는 작품이었죠. 
또한, 지금까지 앰네스티 보고서 중 가장 자세하고 철저한 조사를 거쳐 
중국의 정치범 수용소에 관한 보고서를 냅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미국의 캠프 데이비드에서 평화 협정을 맺었다. 

한국에서는 신현확 보건복지부 장관이 세계보건기구(WHO) 회의 참석차 
한국 관료로는 처음으로 구 소련에 입국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32년 전] 
1979년: 앰네스티의 활동 영역을 ‘정치적 살인’ 반대까지 확장하다
국제앰네스티는 아르헨티나에서 ‘호르헤 비델라’의 군사쿠데타 이후 실종된 2,665명의 명단을 공개했습니다.
이는 앰네스티가 한 국가에서 발생한 거대한 사건을 다룬 첫 번째 활동이었으며, 
활동 영역을 ‘정치적 살인’ 분야까지 넓히는 계기였습니다. 
또, 전세계 사형 현황에 관한 보고서를 내는 동시에, 미국에 사형 집행에 관한 위원회를 설립할 것을 촉구합니다.
*사진: 아르헨티나 실종자들

구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무력 침공하여 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에서는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에 이어, 

12월 12일에는 전두환을 위시한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31년 전] 
1980년, 앰네스티가 최초의 국제적인 사형지 폐지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양심수이자 사형수였던 김대중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영국에서 일어납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30년 전] 
1981년: 창립 20주년을 맞이하다!
국제앰네스티는 각국 정부에 강제실종 된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밝히도록 촉구하는 
국제적인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150여 개 나라에서 이 캠페인에 참여한 회원과 지지자들은 25만여 명에 달합니다. 
또한 창립 20주년을 맞아 런던에서 촛불 밝히기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사진 : 앰네스티 창립 20주년 기념식

프랑스에서는 사형제도를 폐지했다. 

한국에서는 전두환 대통령이 당선되어 제 5공화국이 시작되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29년 전] 
1982년 세계인권선언일(12.10)에 양심수를 위한 전세계적 탄원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인종분리법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반대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침공에 따른 희생자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28년 전] 
1983년 앰네스티는 정부의 정치적 살인과 강제실종에 대한 특별 보고서 발간하고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정치적 살인과 강제실종 반대 포스터


[국제앰네스티 50년사: 27년 전] 
1984년: 유엔, 고문방지협약 채택
국제앰네스티는 고문폐지를 위한 12개 계획을 포함해 2차 고문반대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유엔은 세계인권선언 35주년이 되는 1984년 '고문이나 기타 잔혹한, 비인도적이거나 굴욕적인 대우나 
처벌에 관한 협약'(CAT,고문방지협약)을 채택했습니다.

*사진 : 고문반대 포스터

미국과 이라크가 17년 만에 외교관계를 재개했다. 

대한민국의 전두환 대통령은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26년 전] 
1985년: 앰네스티 첫번째 인권교육 매뉴얼 발간
앰네스티는 첫 번째 교육자료 "인권교육과 학습"을 발간했습니다. 또한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국제대의원총회에서 국제앰네스티는 난민보호를 활동을 포함하도록 규약을 확정했습니다. 
50개 국가에 3,433개 그룹이 활동하고 있고, 회원과 지지자, 구독자의 수가 50만 명이 넘었습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가 소련의 국가수반이 되고 즉각적으로 경제개혁을 실시했다. 

한국에서는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사진)이 있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25년 전] 
1986년: 미국지부, U2와 스팅과 함께 희망 콘서트 개최!
미국지부가 유투(U2), 스팅(Sting) 등이 출연하는 록 콘서트 <Conspiracy of Hope> 개최하였습니다. 
이안 마틴(Ian Martin)이 국제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동영상 : <Conspiracy of Hope> 콘서트에서의 U2의 공연
http://www.youtube.com/watch?v=M3NOfxdGLRA&feature=share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제8차 다자간 무역협상인 우루과이라운드가 있었다. 
86년 우루과이에서 첫 회합이 열린 이래 여러 차례의 협상을 거쳐 93년에 타결되었고, 
95년부터 발효되어 그 결실로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였다. 
한국에서는 부천경찰서 소장이 한 여대생에 성적인 추행을 자행하는‘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있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24년 전] 
1987년: 앰네스티 활동범위 확장
국제앰네스티는 활동범위에 수감자도 아니고, 더 이상 인권침해의 정치적 혹은 비정치적 피해자로 
구분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의적인 죽음도 활동범위에 포함시켰습니다. 
또한 앰네스티는 자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미국의 사형제도에 관한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고문과 잔인하고 비인도적이거나 모욕적인 처우 또는 형벌에 관한 유엔 조약이 발효되었다. 

한국에서는 경찰의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과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이한열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민주항쟁’(사진)이 일어났다. 이에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23년 전] 
1988년: 세계인권선언 40주년!
세계인권선언 40주년을 기념하여 15개국 19개 도시에서 스팅과 브루스 스프링스틴 등이 출연한 세계 순회 콘서트 
<Human Rights Now!>를 개최했습니다. 
이 콘서트로 인해 많은 국가에서 국제앰네스티의 회원이 수가 급속히 늘었습니다.

이해 8월 8일 미얀마에서는 ‘8888 민주화 항쟁’이 일어났다.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됐으나, 새로운 군부의 진압으로 
시민, 대학생, 승려 등 수천 명이 희생됐다. 
한국에서는 노태우 정권이 수립되어 제6공화국이 시작되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 외교를 펼쳤고 
서울 올림픽을 유치했다.

*사진: 미얀마 8888 민주화항쟁의 주역이자 앰네스티의 양심수였던 아웅산 수치


[국제앰네스티 50년사: 22년 전] 
1989년 사형제도에 관한 연구논문을 발간했습니다. 보고서 발간과 함께 
새로운 사형제 반대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독일에서는 11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습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21년 전]
1990년 150개국에서 회원이 70만명으로 늘었고, 70개국에서 6,000개의 자발적조직이 생겨났습니다. 
앰네스티의 전 양심수 레흐 바웬사(사진)가 폴란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20년 전] 
1991년: 국제앰네스티 30주년
국제앰네스티는 설립 30주년을 맞이해, 국제대의원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에 언급된 모든 권리를 증진시킨다는 
지침을 채택했습니다. 이 지침은 무장단체에 의한 인질극 같은 범죄 또한 인권 침해에 포함시켰고, 
성적 지향을 이유로 수감된 이들을 양심수로 고려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슬로베니아와 유고슬라비아 사이의 전쟁으로 발칸 전쟁이 시작됐고, 소말리아 내전이 발생했다. 
또한 냉전의 한 축이었던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 되었다. 유엔 안보리가 남한과 북한의 유엔 가입 신청을 
받아들여, 남한과 북한은 유엔 회원국이 되었다.
*영상: 국제앰네스티 30주년을 맞아 그간 탄원사례를 담은 영상들 중 중국의 ‘왕시저(Wan Xizhe) 사례

[국제앰네스티 50년사: 19년 전] 
1992년: 앰네스티 회원, 100만 명을 넘어서다
국제앰네스티는 70개 국가에 걸쳐 6,000개의 지역 그룹, 100만 명 회원 규모의 단체로 성장합니다. 
이로써 앰네스티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인권 단체로 자리매김합니다. 
세네갈 출신의 피에르 사네(Pierre Sane, 사진)가 새로운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이 되었습니다. 

1992년 한 해 동안, 국제앰네스티는 발칸 전쟁과 소말리아 내전에서 발생한 인권침해를 규탄하는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전쟁이 보스니아까지 확산되어, 보스니아 내전이 시작됐다. 

남한과 북한, 일본의 여성 대표들이 모여 과거 위안부 할머니 인권 침해 문제에 대한 공동 대처를 결의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18년 전] 
1993년: ‘거짓 뒤의 삶’ 캠페인 시작
국제앰네스티는 정치적 살인과 실종, 초법적 사형에 대한 국제앰네스티의 
"거짓 뒤의 삶(The Lives Behind the Lies)"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앰네스티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유엔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했는데, 
이는 오직 인권을 주제로 한 두 번째 유엔국제회의였습니다. 
또한, 앰네스티를 비롯한 인권 단체들의 노력으로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가 설립됐습니다.

*사진: 뉴질랜드 지부에서 벌인 '거짓뒤의 삶' 캠페인 중 '실종자들을 위한 탁자' 퍼포먼스


넬슨 만델라와 F.W 데 클레르크가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한국에서는 긴급 명령으로 
금융실명제가 실시됐고, 서해훼리호가 침몰해 29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17년 전] 
1994년: 앰네스티, 여성 인권 캠페인 시작
여성권리에 관한 국제적 캠페인인 “인권은 곧 여성의 권리(Human Rights are women’s rights,사진)가 
시작됐습니다. 이는 국제앰네스티가 여성 인권을 캠페인의 주제로 채택한 첫 번째 시도였습니다. 
더불어 정치적 실종에 관한 캠페인도 전년에 이어 계속해 나갔습니다.

르완다에서 오랜 기간 갈등에 있던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 심각한 내전이 발생해, 

후투족 군인이 50만 명 이상의 투치족 민간인을 학살했다. 

남아공에서는 양심수 출신의 넬슨 만델라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첫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고, 1994년 1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북미 간 제네바 합의가 이뤄졌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16년 전] 
1995년: “고문거래 반대” 캠페인 시작
국제앰네스티는 고문에 사용되는 모든 도구들의 거래를 반대하는 “고문거래 반대”(Stop the Torture Trade)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유엔 세계여성대회에서는 앰네스티 여성 인권 캠페인과 
명칭이 같은 "여성의 권리가 곧 인권"이라는 결의안이 채택됩니다. 
이는 전년도에 국제앰네스티가 주력한 여성 인권 캠페인의 성과였습니다. 

*사진: ‘켄 사로위와’의 처형에 항의하는 앰네스티의 시위


나이지리아에서 다국적 석유기업의 환경 파괴와 인권 침해를 반대했던 켄 사로-위와(Ken Saro-Wiwa)를 
포함한 8명의 활동가가 처형되었다. 서울에서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는 사상 최악의 사고가 발생했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0년 불법 쿠데타와 광주민주화 항쟁을 유혈 진압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15년 전] 
1996년 국제앰네스티는 상설 국제형사재판소(사진) 설립을 위한 캠페인과 인권침해 실태 폭로를 위한 
의료종사자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변화를 위한 처방’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14년 전] 
1997년 “난민 인권을 위한 국제 캠페인”(사진)이 시작됐습니다. 

미국지부의 조사 결과, 이 해 미국에서 처형당한 432명의 수인들 중 44%가 소수인종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13년 전] 
1998년: 세계인권선언 50주년
국제앰네스티는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맞아 "Get Up, Sign Up!" 캠페인을 시작해 
1,300만 장의 인권선언 지지서명을 모았습니다. 
또한, 120개 국가가 상설 국제형사재판소의 설립의 법적 근간이 된 역사적인 로마조약(the Rome Statute)을 
채택함으로써 국제사회는 역사적인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사진: 세계인권선언 50주년 기념 ‘Get Up, Sign Up!’ 캠페인에 참여한 롤링 스톤스 멤버‘믹 재거’


스페인이 영국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인도를 요청해, 영국에서 피노체트가 체포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이 100개 이상의 여학교에 폐쇄령을 내렸다. 
한국에서는 앰네스티 양심수 출신의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12년 전] 
1999년: 소형무기 확산을 막기위한 노력
국제앰네스티는 5개의 NGO 기구들과 함께 소형무기의 확산 및 소년병 사용을 막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국제 사회가 우간다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30만 명에 달하는 소년병들에게 주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또한, 앰네스티는 인권을 보는 관점을 경제적 상황이 인권에 미치는 영향까지 넓혔습니다.

*사진: 우간다의 소년병 출신 소년이 그린 그림


나토가 유고슬라비아에 공격을 감행하여 ‘코소보 전쟁’이 발발했다. 
그리하여 유고슬라비아에 살던 수만 명의 알바니아 인종이 추방당했다. 
미국의 AP통신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11년 전] 
2000년: 제3차 고문반대 캠페인
국제앰네스티는 제3차 전세계적인 "고문근절(Stamp Out) 캠페인”(사진)을 시작했습니다. 

이 캠페인을 진행한 온라인 공간인 www.stoptorture.org는 "이메일을 가장 잘 사용하는" 웹사이트로 선정되어 

2001년 Revolution Awards를 수상하게 됩니다. 

유엔은 새천년을 맞아 “새천년선언”을 채택하고, 산모 사망 감소를 포함해 8개의 새천년개발목표를 세웠다. 

유엔은 또한,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 철폐에 관한 협약” 선택의정서를 채택했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인권 향상과 남북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10년 전] 
2001년: 국제앰네스티 40주년
국제앰네스티가 창립 4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영국지부는 이를 기념하여 에디 이자드와 친구들
(Eddie Izzard and friend)가 출연하는 새로운 코메디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또한 아이린 칸(Irene Khan)을 사무총장으로 임명하였으며 고문캠페인을 위한 웹사이트 'www.stoptorture.org'로
Revolution Awards 2001을 수상했습니다.

알 카에다의 테러리스트들이 미국 여객기 4대를 납치해 뉴욕 맨해튼의 세계 무역 센터와 워싱턴 D.C.의 
미국 국방부, 펜실베이니아 주에 추락시킨 '9•11 테러'가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3,000여 명이 사망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총리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강행하여 한국에서는 논란이 일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9년 전] 
2002년: 국제형사재판소(ICC) 설립
로마규정의 60번째 인준 완료로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설립되었습니다. 
또한 유엔은 무력 분쟁에 개입된 아동 권리를 위한 아동권리협약 선택 의정서를 채택했습니다. 
국제앰네스티는 수년간의 요청 끝에 처음으로 미얀마 입국이 허가되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2년 첫 국정연설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이라크, 이란을 
'惡(악)의 軸(축)'으로 지목했다. 
대한민국은 일본과 함께 제 17회 FIFA 월드컵을 공동개최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8년 전] 
2003년 옥스팜(OxFam) 그리고 국제소형무기행동네트워크(IANSA)가 함께 
국제적인 무기통제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7년 전] 
2004년 앰네스티는 전세계적으로 여성폭력추방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세계에이즈회의에서 HIV/AIDS 감염자의 인권존중을 요구했습니다. 

여성폭력추방캠페인 포스터


[국제앰네스티 50년사: 6년 전] 
2005년: 국제앰네스티 회원 200만 명 돌파!!!
국제앰네스티는 세계최대규모의, 독립적인 인권단체가 되었다.
"테러와의 전쟁"시대에서 "정의로운 방법으로 테러와 맞선다"는 
고문반대캠페인의 구체적인 목적을 설정했습니다.

사진 : 고문반대캠페인 보고서


기후변화협약에 따른 온실가스 감축목표에 관한 의정서인 교토 의정서가 발효되었다. 
한국에서는 헌법 재판소가 호주제에 대해 헌법 불합치 선고를 내렸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5년 전] 
2006년: 무기거래통제를 위한 백만인 얼굴 서명을 유엔에 전달 후 유엔, 무기거래조약 작업 착수
무기거래통제를 위한 백만인 얼굴 서명 캠페인 결과를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달했습니다. 
이후 유엔은 무기거래조약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또한 호주에서 아이린 칸 사무총장이 국제앰네스티를 대표해 시드니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2003년 체포된 전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반인륜범죄 죄목으로 교수형을 선고 받고 곧 교수형을 당했다. 
반기문 장관이 유엔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4년 전] 
2007년: <Make Some Noise> 음반 출시!!!
요코 오노(Yoko Ono)가 존 레논(John Lennon)의 작품 저작권을 기증하면서 존 레논의 음악으로 만들어진 
<Make Some Noise> 음반이 출시되었습니다. 
유투, 스팅, 에이브릴 라빈 등 30여명의 전 세계적 음악가들이 참여하여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또한 앰네스티는 관타나모의 5년간의 불법구금에 대해 시위하고 의 폐쇄를 촉구했습니다. 
<make some noise> 음반 중 Black Eyed Peas의 “Power to the People”

미국에서는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 33명이 사망하고 2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한국에서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타결되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3년 전] 
2008년: 세계인권선언 60주년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전세계 수천 명의 사람들이 "Fire Up" 캠페인에 참여해 
촛불, 횃불 등을 켜고 인권을 지지했습니다. 
또한 앰네스티는 세계 여성의 날에 소녀들의 교육을 위한 글로벌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전세계에서 여성폭력추방캠페인을 위한 "16일간의 활동"이 시작되기도 했습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이 개최와 함께 앰네스티는 캠페인을 통해 중국의 인권상황을 돌아보고 캠페인을 진행했다.
한국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였고 미국산 광우병 소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2년 전] 
2009년 앰네스티는 산모사망, 슬럼, 기업의 책무성, 권리의 법제화에 초점을 맞춘 
‘나는 존엄하다(Demand Dignity) 캠페인’http://bit.ly/vojBEz 을 시작했습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1년 전] 
2010년 살릴 셰티(사진)가 국제앰네스티의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멕시코의 이주민을 위한 "보이지 않는 사람들(The Invisibles)"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국제앰네스티 50년사: 올해] 
2011년 국제앰네스티 탄생 50주년을 축하하는 ‘자유를 위한 건배’ 행사가 전세계 지부에서 동시에 진행됐습니다. 

중동에서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향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습니다(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