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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nna/글

[꼬리탕탕] 모두가 발가벗겨지는 2014년 4월.

꽃이 피고, 다시 꽃이 질 무렵, 대참사가 일어났다. 사고를 당한 이의 대부분이 학생들이기에 더욱 안타까웠고, 멍하니 희생자의 숫자가 올라가는 것만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은 듣기만 해도 먹먹해졌고, 사고의 원인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천재가 아닌 인재가 되어가고 있어 화가 났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져 차라리 TV를 끄고 외면하고 싶었지만, 이내 다시 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같은 악몽이 반복 되고 있는 것처럼 몽롱한 상태가 계속되면서, 모두가 발가벗겨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보아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수십번 돌이켜봐도, 배와 승객들을 버린 선장이 백번, 천번 잘못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는 처벌을 면하지도, 면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선장의 지시를 따른 선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선장에게 고귀함을 바랄 수도 없거니와, 인간의 생존 본능이 있다 손 치더라도 그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허나, 그를 수백번 비난해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에 속만 까맣게 탈 뿐이다. 분노의 화살은 결국 그렇게 자신에게 돌아올진대, 실종자 가족과 유가족들은 오죽할까. 


어처구니 없이 벌어진 비극적인 상황만으로도 분통이 터질 지경인데, 그 이후의 초동 대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연적인 악조건을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누군가의 목숨을 내어놓고, 대신 실종자의 목숨을 가져오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숫자 파악이 수정될 수도 있고, 경황이 없어 상황 파악을 잘못할 수도 있다. 허나, 발빠르게 사건 수습을 총지휘하는 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왕좌왕만 하는 대가로 누군가의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비극이지 않은가. 


수십년 동안 반복해서 듣고 있는 '초동 대처가 미흡했다'는 말은 도대체 누가 듣고 있는 것일까 싶다. 그래서 음모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봐도 이해가 되지 않기에, 어떻게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 넣고 싶어서, 뭔가 감추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고의 초동 대처에 대한 비판은 굳이 음모론을 근거로 하지 않아도 충분히 정도가 아니라 넘치도록 가능하다. 이러이러한 점을 잘못하고 있지 않은가, 라는 비판을 넘어서서 '너 뭔가 숨기고 있지?!' 라고 하면, 상대는 옳다구나 싶어 '그런 말 하는 걸 보니 넌 종북이지?' 같은 얼토당치도 않은 말싸움으로 변질되고 만다. 지겹지도 않은가. 


상상은 자유라 하니, 정말로 그런게 있다 치자. 국가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떨어져 있으니 충분히 그런 말도 나올 수 있다. 무턱대고 국가를 믿는 것보다는 낫다. 그렇다면 그것을 밝히거나 조목조목 따져 물을 수 있는 역할은 누가 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바로 언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저들 말이 왔다갔다 오락가락해서 그랬어.'라고 변명만 할 것이 아니라, 그림 좋은 것만 딸 것이 아니라, 감정만 건드리면서 눈물 흘릴 것이 아니라, 언론이 해야 할 일을 해야 하지 않은가.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마음이야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다. 그들이 잠수부의 목숨 귀한 줄 몰라 악다구니할까. 그들을 그렇게까지 몰고간 것은 누구인가. 무력감과 죄책감을 그 누구보다 크게 느끼면서, 그것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할 그들인데, 첫날, 둘째날을 허송세월하며 보내는 걸 눈앞에서 보면 어느 누가 악다구니안할 수 있을까 싶다.


그렇다. 사고 이후,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아무도. 


시스템과 인간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시스템을 움직이는 것이 인간이고, 인간을 움직이는 것이 시스템이다. 단 한 개의 시스템도 제대로 굴러가는 것이 없는 것을 지켜보면서, 냉정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움직여야 할 사람들은 자기 자리의 안위를 냉정하게 걱정하기에 바빴다. 국민을 대표하는 이들은 국민이 그들의 힘을 손에 쥐어준 이들이다. 국회의원들, 각 정부 관계처들, 조직의 윗부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그들은, 바로 국민이 쥐어준 그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또 움직여야 했다. 장례식장에 얼굴 내민다고, 사고 현장에 얼굴 내민다고, 직책을 내려놓는다고, 책임자를 엄벌한다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의 자리보다 무거운 책임이 있는 대통령마저도, 책임 회피에 급급할 뿐이다.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 타워가 아니다. 아니다.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 타워가 맞다. 세월호 사고의 책임을 선장에게 묻는다면, 이러한 사고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모든 구조의 책임은 구조 꼭대기에 있는 사람에게 묻는 것이 맞지 않은가. 책임자를 엄벌하고, 사고의 경위를 정확히 파악하며, 최선의 구조를 다해야 한다는 말은 일곱살 짜리도 할 수 있는 말뿐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고 결정을 내려주어야 하지 않는가. 선장이 '어떻게' 탈출하라고 결정내려주지 않았던 것처럼, 대통령도 '어떻게' 대처하라고 결정내려주지 않는다. 긴박한 상황에서 문서 작성하느라 귀중한 10분을 날려먹는 구조 안에 갇힌 이들에게, 대통령은 말하지 않는다.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말을. 

 

모두 분노하며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것을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선장의 탓이고, 평소에 제대로 정비하지 않은 배의 문제이며, 초동수사의 문제이다. 그렇게 따지며 내려가다보면, 내가 현재 있는 자리에서의 역할 문제에까지 미치게 된다. 결국, 일이 터지면 시스템 탓이라며 숨어버리는 한 명 한 명의 개인들 때문에 사고는 일어났다. 그렇다. 우리 모두의 탓이다. 허나, 우리 모두의 탓이라고 가슴치며 우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입장을 바꿔서, 내가 그 자리, 그 위치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보고, 배우며, 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데. 만약 나의 직업이 승선표를 확인하는 일개 직원이라면, 사고 이후부터 바로 승선 인원을 정확히 파악해야겠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지껏 그래오지 않았는데, 나는 그것을 결정하는 윗대가리가 아닌데,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우리 각자의 일상에서 간과하고 회피하며, 관례로 넘어가고 있는 것들을, 이런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제도와 구조 탓이라고, 저 (눈에 보이는)인간 때문이라고 넘어가버리면 쉽다. 그 누군들 책임지고 싶고, 욕먹고 싶고, 어려운 길을 가고 싶을까. 그렇다고 모든 것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또한 국가 탓으로 돌린다고 해서 국민이 무고해지는 것도 아니다. 도대체 왜 도 아니면 모여야 하는가.   


애도도 마찬가지다. 내내 울면서 애도할 수도 있고, 남은 사람들 손이라도 잡아주기 위해 달려갈 수도 있고, 자신의 일상을 지키면서 애도할 수도 있다. 왜 슬퍼하고 죄책감 느끼지 않냐며,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 애도의 방식 하나조차 타인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무슨 굿풀이라도 하듯 아파하고 끝낼 기세다.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을 소모한다.    


큰 재난이 닥쳤을 때 그 나라는 발가벗겨진다. 그 때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있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01년 9월 11일, 911테러 이후 미국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를 선언했다. 테러리스트 색출을 위해 시민의 자유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에서는 한 청년의 무차별 총격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장미꽃을 손에 들고 추도식에 모인 15만 명의 시민들 앞에서 오슬로 시장이 말했다. "우리는 죄인을 벌할 것입니다. 더 관대해지고, 더 관용을 베풀고, 더 민주적이 되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지금의 우리가 취하고 있는 태도는 무엇일까.  


민주주의는 무척 귀찮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반성하고, 고쳐나가고, 요구하고, 인내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그 책임은 국민 모두에게 있다. 끊임없이 국가와 제도를 비판하며 바꿔나가되, 그 방법이 감정적인 비난에만 그쳐서도 안된다. '네가, 네 가족이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보라.'와 같은 감정적인 호소는 한계가 있다. 경황 없는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미안하다며 눈물 흘리고 화내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일상에서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물론 우리 모두는 훌륭한 사람은 커녕, 약하고, 비겁하며, 소심한 개인일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마저도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그래도 진흙 속의 진주처럼 있지 않은가.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 당신과 나의 탓이라고 생각된다면, 슬프고 아프다면, 각자의 자리에서 싸워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비극'이 아니다. 비극은 지금도 우리 손으로 만들고 있다. 시스템과 국가를 순진하게 믿어선 안된다. 순진하게 믿는 순간, 국가는 권력을 휘두르고, 시스템은 목을 조른다. 그것도 약하고 만만한 이들에게만. 그러니 비판해야 한다. 소리도 높여야 한다. 화도 내야 한다. 단, 적어도 그 과정이 자기 반성 및 배려, 행동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일 쉬운 것이 욕하고, 우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싸움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한다면, 지지하고 지켜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저 내 일이 아니기에 안쓰럽게만 여길 것이 아니라, 그저 일개 개인인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냐며 좋은게 좋은 거라고 달랠 게 아니라, 그저 예민하고 유난스럽다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말이다.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나도 지쳐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고, 아무리 울고, 화를 내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분향소의 얼굴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면서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으며, 그렇게 일단락 짓고 싶었다. 그런데,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이를 보았다. 말뿐이 아닌, 몸으로, 눈으로, 마음으로 보여주는 사람 앞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2014년 4월은 잊지 못할 것이다. 

희생된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한다. 

실종된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귀환을 갈망한다.

그리고 난 이제 어떻게 해야 잊지 않을 수 있는지, 

지금 내가 나의 일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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