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만한 책은 다 재미 있게 읽는 필자이지만 유독 싫어하는 두 종류가 있다. 자기계발서와 여행기가 바로 그것인데, 자기계발서는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잔소리가 듣기 아니, 보기 싫어서이고, 여행기는 나는 가보지 못한 곳을 남이 다녀와서 그저 자랑 혹은 감상섞인 글을 보며 약오르기 싫어서이다.
그런 필자가 "혼자 여행하는 법" 따위의 제목으로 여행계발서 같은 글을 쓴다? 낯선 여행지 숙소에서 본의 아니게 정체성을 생각해야 할줄은 바로 30분 전 필자를 픽업하러 온 호텔 차량 속에서는 몰랐다.
그 뿐이랴. 필자의 이름 석자가 맞냐고 묻길래 맞다며 타긴 했지만, 필자의 친구가 들으면 또 모르는 사람의 차를 덥썩 탔냐며 늘어놓을 잔소리가 넷북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의 리듬에 맞춰 쟁쟁거릴 줄도 몰랐다.
하지만 괜찮다. 모른다는 것은 재밌는 것이니까.
그래서 <컨스터블의 눈 대여기>라는 제목은 어떨까 생각한다. 무슨 소리인지 모를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모르니까 재밌을 것이다.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괜찮다. 모르는 것이 소통의 시작일 테니까.
존 컨스터블은 19c 영국에서 유행한 자연주의 화가로서 초록색의 발견자라고 불리울 만큼 풍경화에서는 윌리엄 터너와 함께 유명한 (필자에게는 아니었지만) 사람이다. 필자는 독단적인 결정 아래 컨스터블을 1박 2일 정동진 여행에 동석시키고자 한다.
없지 않은가. 21c를 사는 사람이 19c 사람과 여행을 하면 안 된다는 법은.
무언가 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북돋아줄 기차역의 부산스러움과 설렘은 없었다.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의 청량리역은 바닥이 너무 반들반들하여 반원의 의자 다리가 동그라미를 그린다. 마치 휠체어 같다.
내심 운명의 만남을 기대하게 하는 (모두 드라마 첫 회의 영향 탓이라 생각한다. 운명의 만남은 드라마에서처럼 일상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차의 옆자리는 동성이었다. 하지만 이성이 아니라고 해서 운명의 만남이 아니라고 보는 것 역시 고리타분한 사고 방식이라며 창문 틀에 앉은 작고 귀여운 컨스터블이 대꾸한다.
역시 예술가라 그런지 까칠하다. 하지만 21c에 운명의 만남은 아이폰 속에서나 이루어지는 법, 아이폰이 없으면 소통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더러운 세상이다. 필자는 옆, 앞, 뒷자리의 사람들이 모두 커텐을 쳐버리자 당황하고 있는 컨스터블을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들어 올려 어깨에 올려 놓은 뒤 자리를 옮겼다.
여행을 다녀온 바로 다음 날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되고 있는 영국 근대화전에 가볼 생각이었다. 근대라 하면 미술을 비롯 어떤 분야든 다양한 주의와 많은 인간들이 나타나는 터라 복잡하고 슬 기억의 한계가 오는 시기이다.
당신, 컨스터블은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뒷조사를 한다. 산업혁명 이후가 어떨지 생각해보는 것은 무슨 무슨 주의가 생겼는지 외우기 전에 그냥 우리 자신을 생각해보면 된다. 아이폰이 생겨나자 사람들은 좀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편리한 기능을 찬양한다. 그러면 한 구석에선 아나로그에 대한 향수나 그 시절이 좋았다는 등의 그리움이 기어나오기 마련이다.
우리의 컨스터블은 아이폰보다는 오락가락 하는 날씨가 더 좋은 듯 하다. 복작복작한 대륙에 비해 꾸물꾸물한 기후의 섬나라에서 풍경화가 발전하는 건 당연할 것이다. 바로 조금 전만 해도 기차 밖의 풍경은 뿌연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갑자기 가을의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컨스터블의 손길이 바빠진다. 안개낀 날의 산자락은 초록색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얀색도 아니지만. 하얀색과 초록색 그 사이 어디 즈음도 아닌 건 물론이다. 그들의 그림이 인상주의에 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는지는 머리가 아닌 눈으로 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안개가 훅 걷힌 다음의 세상.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빛과 자연의 향연.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컨스터블과 같은 그림을 본 프랑스 화가들이 색채와 빛의 원리에 대한 갈망을 하게된 건 당연할 것이다. 사진이 발명된 터라 더 이상 초상화나 정밀화가 필요 없게 되어 밥벌이 걱정도 했겠지.
그리고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를 표현하다보니 그런 이미지들을 영원한 시간 속에 머물게 하고 싶었을 신인상주의자들의 갈망도 공감이 된다. 그런 갈망 위에 갈망이 쌓이고 쌓이면서 늘 그 다음, 그 다음이 만들어진다. 아놔, 예술가들이란.
컨스터블이 모네와 쇠라, 고흐까지 불러들여 수다를 떠는 동안 동해로 향하는 기차는 갑자기 속력을 늦추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유일의 스위치 백 구간이란다. 그게 뭔데? 무슨 일이 일어날 건데? 대답 없이 기차가 이윽고 멈춰선다.
아, 롤러코스터를 타고 제일 꼭대기에 올라 미끄러 떨어지기 직전의, 자이로드롭의 제일 꼭대기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멈춰서는 순간의 느낌이다. 순간 온 몸을 긴장시키는 필자를 조롱하듯 기차는 아무렇지도 않게 문워크를 한다. 그래, 올드보이의 오대수에게 하는 그 말이 맞다. 진정 공포는 상상력이 만들어낸다.
뭥미? 하는 얼굴의 필자에게 풍경 속의 한 여인이 손을 흔들어준다. 하루에 몇 번이고 기차가 가다가 뒤로가는 모습을 볼텐데.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손을 흔드는 걸까. 그 알 수 없는 다정함에 보이는지, 보이지 않는지 머슥한 손짓으로 따라 흔들어본다. 일탈에 대한 동경이 섞인 눈빛과 안정에 대한 동경이 섞인 눈빛이 비껴 지나간다.
그냥 이 퍼런 물을 보려고 6시간동안 컨스터블의 수다를 참았다. 멍하니 조그마한 카메라 프레임에 담을래야 담을 수 없는 바다를 향한 감탄사도 없이 보고 있노라니 한 가지 깨달음을 절로 깨닫는다. 컨스터블이 화가가 되지 않았다면 해적이 되었으리라.
조금도 비뚤거리지 않는 직선의 수평선 저 너머에 뭐가 있을지 직접 가 보았으리라. 아니면 갈릴레오의 말이 틀렸다며 법정에서 소리칠지도 모르겠다. 어째서 지구가 둥근 것이냐고. 저 끝의 끝까지 가면 분명 절벽처럼 떨어질 것이라고.
피사체 되어주려 여기까지 온 그들에게도 경의를. 그들도 풍경으로서 그릴 생각 없냐고 컨스터블에게 묻자, 농부가 아니라서 싫다며, 벤치에 새겨져 있는 이건 무슨 의미냔다.
음.. 당신 후세에 사실과 환상을 교차시키면서 독일 표현주의 화가나 초현실주의자에게 영향을 준 루소와 비슷한 화풍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랑의 유통기한과 같은 이론에 영향을 받지 않은, 악몽 같은 환상이 본질이라 생각한 어떤 연인의.
여기 또 다른 미친 노아가 있었다. 길이 165m, 높이 45m, 3만톤의 실제 유람선. 타이타닉호는 길이 260m, 높이 20여m, 4만6,000톤이었다고 하니 역시 사람의 욕심은 끝도 한도 없다.
하지만 가끔은 사공이 많아도 그럴 듯 할 수 있겠다. 비가 억수로 오면 노아의 배처럼 뜨는 거냐고 컨스터블이 물어서 필자는 아니, 하늘을 나는 해적선이라고 대답해주었다.
봐라. 내 말이 맞지 않느냐고.
200년 전의 컨스터블도 보았을 풍경들. 아, 일출이 전봇대와 줄넘기하는 건 못봤을 수도.
컨스터블, 당신이나 나나 굳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필요가 없지 않을까? 태양은 매일 바다 위에 그림을 그리고, 그걸 찬사하는 글을 써도 쟤네들은 글을 모르잖아.
..그러게.
모든 예술가의 작업은 자연에 대한 외경심으로부터 출발하는 법이며 자연에 대한 모방을 거쳐 종국에는 자연의 일부를 이룩해냄으로서 그 완성을 꾀한다. 나의 소똥으로 된 조각 작품이 기왕의 경우와는 달리 전부 허공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은 소라는 생물이 그 배설물인 소똥을 자신의 신체로부터 땅으로 떨어뜨려 지극히 안정된 상태로 진열한다는 정형화된 조건에 대한 반역이다. - 소똥 미술관의 작가 노트 중 -
컨스터블과 필자 둘은 점점 말이 없어진다. 감상에 젖는 것도 귀찮고, 여행이 끝날 무렵이면 닥쳐올 현실의 할 일들이 머릿속을 괴롭힌다. 이 일탈이 일상이 되면 그것 또한 일상이 되어버리겠지. 일상을 계속 일탈로 만드는 것도, 일상을 유지하는 것도 힘든 법이다. 무엇이 일탈이고, 무엇이 일상인지, 뒤죽박죽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다음은 항상 궁금한 법이니까. 그 결말을 미리 안다 할지라도.
심심하니까.
여행을 다녀온 다음 날, 영국 근대회화전에서 컨스터블의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도 꽤나 심심했던 모양이다. 징글징글 맞도록 섬세한 붓터치들을 보면. 하지만 동시에 시시함을 느낀다. 인상주의 친구들을 거쳐 다양한 현대 친구들을 만나도 심심하긴 마찬가지일 것 같다. 오히려 박진감 넘치는 현실이 목을 죄여 온다.
내일 당장 닥쳐올 아침 출근과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하고 싶지 않은 일과 애써 의미 부여를 하며 하고 싶은 약간의 일들 때문에 여행의 의미 부여 따위나 컨스터블과의 작별 인사 같은 걸 할 틈이 없다.
하지만 다행이다. 그 곳에서 보았던 달과 구름이 여기에도 있다. 어찌될지 모를 막막함과 불안감을 생성해내야겠다. 그것이 일상 탈출에 대한 욕구 때문이든, 이루지 못했던 꿈에 대한 갈망이나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무기력한 삶에 대한 반역 때문이든지는 상관 없다.
컨스터블,
당신이 바라본 세상 역시 그저 평화롭지만은 않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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